할머니께서는 식사를 마치시면 늘 녹차를 드셨다. 남부철기(南部鉄器)로 만든 큐스(急須)에 녹차 잎 한 숟가락을 넣고 따뜻한 물을 부어 40초 동안 우려낸 후, 유노미(湯呑み)에 가득 채우시곤 했다. 정성 들여 우려낸 그 녹차에서는 진한 쓴맛 속에 은은한 단맛이 배어나는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일본에서 녹차는 시즈오카나 교토 우지처럼 지역마다 고유의 풍미를 지닌 고급 찻잎이 있으며, 단순한 음료를 넘어 하나의 '문화'로 소중히 여겨진다.
반면 한국에서는 녹차 외에도 다양한 차를 경험했다. 감잎차, 옥수수차, 둥굴레차 등 '의식동원(醫食同源)'이라는 말처럼 건강을 중시하는 차가 풍부했다. 모두 향긋하고 몸에 좋으며 부드러운 맛이었다. 처음 한국에서 녹차를 마셨을 때, 일본 녹차의 쓴맛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자극적이지 않고 연하게 느껴졌다. 일본 녹차의 떫고 진한 맛만 알던 시절에는 그것이 '맛있는 차'라고 생각했으니까 한국에 와서 처음 접한 티백 녹차는 연하게 느껴져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과 함께 광덕사를 방문했다. 사찰 안을 걷다가 우연히 스님 한 분을 만났고, 멀리서 왔다는 저희에게 차를 대접해 주시겠다며 아담한 방으로 안내해 주셨다. 스님께서 건네주신 차 한 잔은 연한 노란빛을 띠고 있었으며,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그 차를 마시며 느꼈던 마음의 편안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전에는 한국 하면 김치나 불닭처럼 붉고 매운 자극적인 음식만을 떠올리기 쉬웠다. 하지만 사찰에서의 차 경험을 통해 한국 문화의 또 다른 면을 알게 된 듯한다. 매운맛 일색의 한국 음식 뒤에 숨겨진, 마음을 진정시키고 편안함을 선사하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문화적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굳이 그 나라에 가지 않아도 다양한 차를 쉽게 구할 수 있다. 차 맛은 단순히 찻잎의 종류뿐 아니라 그 땅의 공기, 물, 기온, 그리고 함께했던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 기억된다. 일본 녹차의 떫은 맛은 식사 후 차를 우려주시던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고, 한국 사찰에서 마신 부드러운 녹차는 복잡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던 평온의 순간을 상기시킨다. 때로는 매운 음식을 먹은 후 달콤한 믹스 커피나 아이스 커피가 생각나듯, 마음을 진정시키거나 집중해야 할 때는 쌉싸름한 일본 녹차가, 편안함이 필요할 때는 부드러운 한국의 차가 각기 다른 매력과 의미를 지닌 이 모든 차들이 그 자체로 소중한 차 한 잔이다.
오노이쿠요(일본)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