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다문화]제갈 공명의 묘 추풍오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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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리
제갈량(181년-234년)은 중국 삼국시대(220년-280년)의 뛰어난 정치가, 전략가, 발명가, 문학자로 역사 속에서 빛나는 인물로 남아 있다.



그는 필자가 아주 좋아하는 역사 인물 중 한 명으로 이번 겨울방학에 필자의 아이와 함께 제갈량 묘에 가게 되었다.



사실 중국에선 제갈량 묘가 있는 곳이 많은데, 우리가 이번에 간 곳은 산시 치산(岐山) 오장원(五丈原)의 제갈량 묘였다. 그렇다면 '오장원'은 제갈량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제갈량은 삼국을 통일하여 한 나라의 부흥을 일으키려는 위업을 목표로 북벌을 몇 번 시도하였다, 또 3년간의 준비 끝에 234년에 마지막 북벌이 재개되었고, 촉군과 위군 은 '오장원'에서 대치하였다.



촉군과 위군의 전투가 시작했지만 위군의 사마의는 진지를 굳게 지키고 촉군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진령산맥이라는 큰 산맥이 자리했기에 촉군의 병사, 그리고 군량의 이동까지 쉽지 않았다, 결국 4개월 동안 대치한 끝에 그해 8월에 제갈량은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54세에 몸져눕고 말았다.



제갈량은 끝내 삼국을 통일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였지만 그에 관한 이야기는 민간에서 널리 퍼졌다, '오장원'은 제갈량이 수십 년 간 남정북전의 마지막 전장이었고, 또 그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에 당나라 초기에 '오장원'에 제갈량 묘를 세웠으며, 송, 원, 명, 청 시대에도 계속 복원하여 건설되었다.



지난 1월 9일에 우리는 드디어 추풍오장원에 도착해 제갈량 묘에 들어서게 되었다. 좀 놀란 것은 여기서 중국어와 영어뿐만 아니라 한국어 설명도 있었기에 아이가 본인 스스로 각 건물의 역사와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제갈량 묘에 들어서자마자 천여 년 된 큰 회화나무를 보았는데, 세 개의 주요 나뭇가지가 서로 뒤엉켜 있는 모습이 매우 신기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것을 '결의 회화나무'라는 이름으로 명하여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의 결의 이야기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정전의 남쪽에는 낙성정(落星亭)이 세워져 있는데, 정자에 운석이 하나가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제갈량이 죽일 때, 오장원 남쪽에 운석이 떨어졌다고 한다.

정전 서남쪽에는 제갈량의 의관총이 있었다. 제갈량이 죽은 후에 촉군이 그의 시체를 한중으로 운송하여 면현의 정군산에 매장하였고 이와 동시에 제갈량 생전의 의관을 이곳에 묻어 기념으로 삼았다고 한다.



제갈량묘를 거닐다가 각 시대의 유명한 사람들의 서예작품을 보고 제갈량에 관한 여러 가지 흔적을 보며 1700여 년 전의 비장함과 소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상태로 아이와 제갈량의 일생에 관해 열띤 토론을 했다,필자는 기사를 쓰고 아이는 일기를 썼다. 아이의 일기를 보니 이러한 부분이 적혀 있었다.



"제갈량의 옷과 모자를 묻은 곳에 도착했다, 앞에는 편지 몇 통과 꽃이 있었다. 엄마는 편지를 읽고 감동을 받아서 울었다, 편지의 마지막 줄은 '지금 여긴 전쟁이 없다, 지금 여기선 모든 것이 다 좋다.'라는 내용이었다."

제갈량의 바람대로 '지금 여긴 전쟁이 없다. 지금 여기선 모든 것이 다 좋다'라고 그에게 알려주고 싶고 그의 옅은 웃음을 보고 싶다. 당리 명예기자(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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